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눈 내리는 하루 - 아침편
    Life Hacks/알쓸신잡 2022. 12. 15. 22:18

    눈 소식이 요란하더니, 진짜 눈이 내린다. 아침부터 요란스럽게도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큰아이 등굣길 배웅을 다녀오니 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의 온기가 새삼스럽다. 우리 집이 이렇게 따뜻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눈 송이 정밀 촬영 사진.
    학교 가는 길에 찍은 예쁜 눈송이.

     

     

    눈이 오는 날 아니면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날은, 쌓인 눈이 생동하는 모든 소리를 잡아먹은 것처럼 온 세상이 조용하다. 이따금 들려오는 소리도 이불속에서 내지른 소리처럼 선명하지 않다. 그리고 온통 회색 아니면 하얀색으로 덮인 풍경은 그 색깔만큼이나 하루가 단조롭길 바라는 게으름이 밀려온다.

     

    외투는 대충 털어 걸어 놓고,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집이 바깥 풍경의 색에 물들었는지 더불어 우중충하다. 흐린 하늘 같은 거실 한가운데로 갈색 털 뭉치 한 마리가 걸어온다. 요란한 꼬르륵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털 뭉치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난다.

     

     

    네 밥 좀 먹어라, 김박사야!

    꼬르륵 갈색 털 뭉치는 요새 본인 사료를 안 잡수신다. 맛이 없는 건 아닌 것 같고, 다른 음식을 동정으로 받아먹어 볼 요령으로 자꾸 단식 투쟁을 한다. 밥보다 디저트가 좋으신가 보다. 우리 집 어르신 김박사는 겨울이 되니 단걸 너무 좋아하셔!

     

    "그래. 먹자, 먹어!" 한 몸 같던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오전에 애들 아침으로 설탕 토스트를 해 먹였는데, 나도 그거나 해 먹어야겠다. 우선 세탁기를 좀 돌리려고 세탁실에 나갔다가 고구마도 발견했다. 외할머니가, 엄마가 보낸 택배에 끼워 보낸 고구마다. 고구마도 굽고, 빵도 굽고 해서 귤이랑 커피 한 잔까지. 제법 아침 메뉴가 다양하다.

     

    눈 오는 날 고구마라면 역시 군고구마지! 오븐이 예열되는 동안 고구마를 씻어 오븐 판에 놓는다. 가스불을 켜고 프라이팬을 달궈 버터를 녹인다. 녹은 버터가 잘 발라진 프라이팬 위에 식빵 두 장을 올리고, 그 사이 예열된 오븐 안에 고구마를 넣는다.

     

     

    오븐 안에 들어간 고구마.
    외할머니가 보내 주신 고구마를 오븐에 넣었다.

     

     

    식빵을 뒤집고 설탕을 준비하는 사이,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혼자 챙겨 먹는 주방도 제법 분주하다. 나는 일을 하는 순간에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공백이 싫다. 일과 일 사이에 해야 할 일들이 톱니바퀴처럼 혹은 레고 블록처럼 딱 들어맞아서 순차적으로 잘 진행될 때 기분이 좋다. 이상한 성격이다.

     

    잘 구워진 식빵 위에 설탕을 솔솔 뿌리고 다시 뒤집어 달고나 냄새가 나게끔 설탕을 녹인다. 전문 용어로는 캐러멜 라이징이라던가, 아무튼 잘 녹인다. 나는 설탕을 좋아하니까, 양면을 다 그렇게 설탕을 뿌려 녹여 토스트를 완성한다.

     

    그 사이 전기주전자가 탁 하고 스스로 일을 끝냈다. 다음은 캡슐 커피를 이용해서 아주 쉽게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뜨거운 물을 부어버린다. 아메리카노는 그런 거다. 잘 뽑아낸 커피의 정수에 물을 끼얹는 그런 행위인 것이지. 캬하하하하.

     

    이제 뭐가 남았더라 멍 때릴 때쯤, 오븐에서 고구마를 찾아가라며 소리를 내준다. 아, 몹시 뜨거운 오븐님이 더 뜨거운 고구마 님을 낳아주셨다. 젓가락으로 가차 없이 찔러 속까지 익었는지 확인 후에 집게로 고구마를 꺼내 준다.

     

     

    식빵 두 장, 고구마 두 개, 귤 하나, 커피 한 잔의 아침 식사.
    나름 잘 꾸며본 아침 식사.

     

     

    나는 예쁘게 세팅하는 법을 모르니, 대충 그릇에 진짜 대충 담아내지만 요즘은 블로그를 하니까 살짝 멋을 내본다. 귤도 하나 집어가고 우리 집 다용도 메인테이블로 향한다. 하, 나보다 먼저 고구마 냄새를 맡은 저 코 좋은 김박사가 먼저 뛰어간다.

     

    뜬금없는 정보 - 겨울 철 비만견들의 최대 적, 고구마.

    겨울에 동물병원을 가게 되면 의사 선생님들이 주의를 주는 음식이 있다. 그중 경·중·고도 비만견들에게 특히 더 강조하며 말리는 음식은 고구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있는 멍멍이냐는 질문도 빼먹지 않지. 할머니들은 손주들도 멍멍이들도 말라깽이로 있는 걸 못 참는다.

     

    아무튼, 그런 고구마는 우리 김박사의 최애 음식 중 하나이다. 밥 대신 고구마를 주면 나도 차라리 편하겠지만 김박사는 소화 장애가 있어 고구마를 조금밖에 먹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고구마 냄새에는 유독 광기 어린 반응을 보인다.

     

    고구마. 그런 김박사의 최애 음식을 오늘, 내가 구웠다. 오븐에 구워져 더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고구마는 김박사의 후각에 엄청난 자극일 테지!

     

    테이블에 앉자마자 폭풍 꼬리 흔들기 쇼가 시작됐지만, 나는 절대 휘말리지 않는다. 그래도 나름의 서두름으로 고구마를 집었지만, 뜨거워! 엄청 뜨거워! 이거 쪼개서 식혀줘야 되는데, 지금 김박사는 이성을 잃었다.

     

     

    고구마와 노령견
    김박사, 맛있냐? / 먹을 땐 차분히.

     

     

    내가 더 급해지는 순간에 '아뜨, 아뜨.'를 반복하며 고구마를 가르고 우선 식힌 고구마를 김박사에게 준다. 맛있냐? 쪼개고 식히는 시간은 먹는 찰나에 비하면 영겁에 가까웠다.

     

    그렇게 여러 차례 고구마를 떼어주고, 커피가 뜨거움에서 따뜻함으로 넘어갈 즘에 나도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창 밖의 풍경은 겨울스럽게 멋졌고, 빵과 고구마는 달았다. 이 순간, 수의사님이 잊은 말이 하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이 내리는 겨울 산의 모습.
    펑펑 내리는 눈, 겨울스럽게 멋진 풍경.

     

    "보호자님도 겨울에 고구마 조심하세요."라는 말. 겨울에 비만인이 되는 건 김박사가 고구마를 먹는 시간만큼 빠르다. 겨울이 추워질수록 이 돼지 로운 생활도 길어질 텐데, 걱정이 되면서도 고구마는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