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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낡은 기록
    Life Hacks/알쓸신잡 2022. 12. 3. 20:39

    오래된 것에 대하여

    옷장 속 상자 안에 고이 모여있던 초등학생 시절 성적표, 예쁘다며 모아뒀던 병뚜껑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냄새나는 스웨터 등 버려야 할 물건들이 어째서인지 엄마 집에는 가득하다. 주인인 내가 와서 버리지 않는 한 오래된 무덤 속 관처럼 계속 존재할 것만 같은 물건들이 말이다.

    나에게는 쓰레기, 엄마에겐 간직해주고 싶은 딸의 소중한 기억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고향에 오게 되었다. 오래된 것, 낡은 것들을 마주할 용기를 내면서.

    여전하다 싶은 집의 외관과 익숙하고 묘하게 따뜻한 냄새,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편안한 듯 불편한 생활 모습은 내가 살았던 '집'에 왔음을 상기시켜준다. 물론, 온전히 내 집이라는 느낌은 이제 없다. 내 집은 다른 곳이라는 걸 몸도 마음도 잘 알지만 어쩐지 고향집은 나른하게 주어지는 안락함이 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늘어지는 그 느낌. 하루 이틀이면 질리는 공기와 분위기의 흐름이랄까.

    친정집과 내가 사는 곳은 서로의 거리가 4시간 이상만큼 멀다. 오는 길도 되돌아가는 길도 굉장히 피곤한데, 그 탓인지 웬디(남편)가 몸살이 났다. 지난날, 계속됐던 출장의 피로도 쌓여있던 터라 몸살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긴 하다.

    아침에 일어나 서둘러 밥을 먹고 동네 병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가는 동네 병원인데 어릴 때부터 가던 병원을 내가 아닌 웬디를 데려가자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걸어가는 길도 여전했고, 병원 건물도 그대로에 심지어 간호사 이모도 원장님도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찾아간 어린 시절 다니던 동네 병원의 환자 기록지 정리 선반과 접수대 풍경.
    아직도 손으로 작성 중인 환자 기록지



    달라진 건 켜켜이 쌓여있는 세월의 흔적들로 인해 낡아진 의자와 벽, 집기류들 뿐이었다. 원장님은 많이 연로해지셨지만 같은 음색으로 어릴 때와 같은 속도로 느릿하고 차분하게 진료를 봐주셨고 간호사 이모는 다소 수다스러우면서도 특유의 유쾌함으로 주사를 놔주셨다. 물론, 이번에 내 엉덩이는 아니었지만! 하하!

    신기한 건 나를 기억해준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아프면 다니던 병원이라 익숙하고 모두와 친한 건 맞지만 그래도 고향에서의 공백이 길었던 터라 기대치 않았던 반응이다. 쑥스럽고, 기분 좋은 당혹감에 다시 어린 시절의 내가 된 것 만 같았다.

    "애들 키우느라 힘들지?"라고 가볍게 건네는 안부도 어쩐지 위안이 됐달까. "이제 다 컸으니까, 사탕은 안 줘도 되지?"라고 묻는 의사 선생님의 질문도 그리운 느낌이었다. 내가 아파서 간 병원도 아닌데 내가 치유받고 온 신기한 경험.

    어린 시절만큼 잔병치레를 하지 않게 된 나는, 이제 병원은 잘 가지 않아도 될 만큼 튼튼한 어른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이나 간호사님은 건강하게 자라 아이까지 낳은 내가 되려 신기하고 기특하시겠지.

    시간은 빠른 속도로 흐르며 온갖 것들에 본인의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은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기억, 추억, 혹은 상처라 불린다. 나는 오늘 추억과 잠시 맡겨뒀던 기억을 보고 왔다.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경험에 한 동안 일상 속에서도 은근히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